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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방상훈 사장 창간 102주년 기념사 전문] “나라와 국민 위하는 언론인의 사명 잊어선 안돼”
이름 관리자
날짜 2022/03/05

사원 여러분, 창간 102주년을 맞아 조선일보 102년 사(史)의 주춧돌을 놓은 우리 선배들을 떠올려 봅니다. 조선일보는 3·1 운동의 함성에 놀란 일제가 마지못해 허가해 줬던 최초의 민간 한글 신문입니다.

“그놈이 있는 이상 서장 노릇 못 해먹겠다.” 1926년 당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장 모리가 탄식하며 뱉은 말입니다. ‘그놈’은 당시 조선일보 주필이던 민세(民世) 안재홍을 말합니다. 안재홍은 1926년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거사를 호외 보도하고, 숱한 일제 비판 사설 등으로 경찰에 붙잡혀 가면서 9차례에 걸쳐 총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 기간 조선일보도 압수는 물론, 무기정간 처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옥고를 치르고 나오면 다시 펜을 들어 할 말은 하는 ‘참 언론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는 또 ‘민족 지도자’인 월남 이상재 선생과 함께 좌우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 항일 단체 ‘신간회’를 창립하기도 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손자 이홍직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선배입니다. 1930년 조선일보가 민간 한글 신문 최초로 실시했던 공채 시험을 통과한 ‘공채 1기’ 중 한 명으로, 학예부와 정치부 등을 거치면서 항일의 필치를 날렸습니다. 그는 일제의 강압으로 조선일보가 폐간당하기 직전, 당시 사장이던 계초 방응모 선생으로부터 “잡지 ‘조광’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폐간이란 건 일제의 탄압이 분명한데 더 붓을 들고 있을 순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홍직은 광복 후 조선일보에 다시 몸담았고, 1991년에는 이상재 선생 육성이 담긴 음반과 사진 등 소중한 자료들을 조선일보에 기증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선배들도 있었습니다. 1924년 일제 시대 민간 신문 첫 여기자로 조선일보에 입사한 최은희를 두고, 당시 잡지 ‘개벽’은 “그의 재필(才筆)과 활완(活腕), 건각(健脚)은 여간한 남자 기자로는 앙망(仰望)도 못할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최은희 못잖았던 여기자도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두 번째 여기자 윤성상입니다. 그는 극도의 남성 중심 사회였던 1929년 여성 독자들이 사회에 대한 비판·불평을 쏟아내는 〈부인 공개장〉 기획을 주도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간 변심한 남편에게’ ‘버스걸은 당신네 놀림감인 줄 압니까’와 같은 당시로선 시대를 크게 앞서간 파격을 선보였습니다.

이밖에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당당히 맞서며 우리말을 지켜낸 〈새 나라의 어린이〉 작사가 윤석중, 교정부 기자로서 한글 지키기에 앞장선 외솔 최현배 선생 아들 최영해와 주시경 선생 아들 주왕산도 우리 선배들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17번이나 옥살이를 한 ‘저항시인’ 이육사는 그의 두 동생까지 3형제가 모두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에도 많은 선배의 피와 땀으로 뿌리내린 조선일보를 향한 민중의 애정은 깊었습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1년여에 걸쳐 본지 학예면 기사 140여건을 오려붙인 스크랩북을 만들며 시인의 꿈을 키웠고, 시 〈아우의 인상화〉 〈유언〉, 수필 〈달을 쏘다〉 등을 조선일보에 투고했습니다. 소설 연재 등으로 웬만한 조선일보 기자보다 더 많은 글을 조선일보에 실었던 만해는 1940년 본지 폐간을 애통해하는 한시를 써 “붓이 꺾여 모든 일 끝나니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 벼루못을 외면한 채 바다 향해 흐르나니”라고 울분을 토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일보 102년 사(史)에는 조선 항일의 역사, 계몽의 역사, 한글과 민족혼 수호의 역사 등이 함께 응축돼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민족 정론지로서 감내해야 할 굴곡도 많았습니다. 조선일보는 일제하에서 4차례 정간과 500여 차례 기사 삭제라는 시련을 꿋꿋이 견디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1940년 8월 10일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호를 만든 뒤 조선일보 기자들이 마지막으로 편집국에 모여 찍은 사진 한 장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 사진에 남아 있는 선배들의 허탈하면서도 울분에 찬 표정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선배들은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말한다’는 조선일보의 원칙을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족과 나라의 번영에 앞장서겠다’는 대의(大義)를 지켜오면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등 시대의 주요한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조선일보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문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정치 세력이 역사의 한 부분을 취사·과장해 조선일보를 공격하고 있지만 결코 역사적 실체마저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사원 여러분,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도 지난 세월만큼 엄중합니다. 밖으로는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미·중·러 등 강대국 간 갈등, 보호무역주의 광풍, 미국발(發) 통화 긴축의 후폭풍으로 한 치 앞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나라 안에서는 지난 수년간 이어진 ‘갈라치기’의 여파로 갈등과 분열이 가장 큰 사회적 병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민주주의 핵심 가치인 ‘언론의 자유’마저 심각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당한 보도까지 ‘가짜뉴스’로 규정하며 집요하게 언론을 공격하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팩트가 무서워 팩트를 흐리는 세력들입니다. 시민단체로 위장한 이념단체들은 언론사는 물론, 기자 개인을 향한 공격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진실의 수호자’로서 언론의 역할은 더욱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사원 여러분, 1등 언론 조선일보가 나아갈 길은 명확합니다. 어떤 정권이 등장하더라도, 아무리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더라도 우리 미래의 핵심은 바로 흔들리지 않고 ‘할 말을 하는’ 저널리즘 정신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핵심 가치를 지켜내고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따뜻한 기사로 국민을 보듬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창간 102번째 생일을 맞는 우리는,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저널리즘의 탄탄한 근본 위에서 신기술의 옷을 입은, 새로운 방식의 저널리즘으로 빛나는 미래를 개척해 나갈 것임을 다짐해 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예사롭지 않은 시기에 모두들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신문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전국 1007개 지국의 지국장님들과 1만4000여 종사원 여러분들과도 오늘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끝으로 오늘 30년 근속상을 받는 박정훈 논설실장을 비롯해 총 54명 수상자분에게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