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일보 창간 104돌입니다. 제가 사장이 된 1993년부터 서른 한 번째 해입니다.
31년 전 취임식에서 저는 “선대가 훌륭히 이뤄놓은 업적을 손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내리누르는 중압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제 저는 ‘조선일보 사장’이라는 막중한 소임을 내려놓고 회장으로서 회사 발전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헤아려보니 100년이 넘는 조선일보 역사에서 3분의 1을 사장으로 보냈습니다. 뜻하지 않게 한국 언론사상(史上) 최장수 사장 기록도 남기게 됐습니다. 그 기간 6번 정권이 바뀌고, 7명의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조선일보는 최고 신문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숱한 곡절이 있었지만 외압에 굴하지 않은 기자들, 헌신적으로 재정독립을 지켜낸 경영직 사원들 덕분에 정상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이 어떤 권력과 자본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그 역사를 함께 해주신 전·현직 사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1993년은 군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해였습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따른 중산층 시대가 본격 개막하면서 여론을 선도하는 조선일보에 대한 기대가 큰 시기였습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같은 캠페인으로 조선일보가 앞장서면 온 사회가 호응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권력은 ‘성역없는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의 필봉을 꺾기 위한 협박과 탄압이 잇따랐습니다. 그 때마다 저나 조선일보 기자들이 권력 눈치를 살피며 줄타기 했다면 지금의 조선일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장으로서 제가 선택한 것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이었습니다.
2001년 8월 권력은 구속영장으로 저를 시험했습니다. 저는 영장판사 앞에서 “한국 최대 신문의 발행인으로서 외부의 모진 협박과 탄압으로부터 수백 개의 펜들을 지켜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고초가 따르더라도 그 신념을 꺾거나 지조를 굽히는 결정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저는 조선일보부터 찾았습니다. 다시 만난 기자들 앞에서 저는 옥중에서 읽었던 성경 구절을 인용해 “사도 바울이 ‘내가 갇혀있음으로 그리스도가 더욱 전파되는 것이 기쁘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에 내가 구속됨으로써 한국의 언론자유가 지켜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 없이 기쁜 마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저는 언론 경영자로 단련됐습니다.
언론 경영자로서 저를 버티게 해준 두 개의 정신적 기둥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저희 할머니의 독실한 기독교 정신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도덕 기준과 신앙심은 숱한 외부 공세와 비방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습니다.
‘1등 가는 사람 찾아내 1등 가는 대우 해주자’는 계초(啓礎) 방응모의 정신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사장으로 일한 31년은 조선일보를 1등 회사로 만들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언론사의 가장 큰 자산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신문 업계 최초로 개인연금과 주택자금 대출을 만들고, 연수특파원제와 글로벌 챌린지 프로그램(GCP)을 신설했습니다.
회장으로서 저는 계초의 정신을 새롭게 계승하려고 합니다. 임직원들이 일에 더욱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미래 인재들을 끌어들일 파격적인 복지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퇴임 언론인이 품위를 지킬 수 있게 돕는 방안을 찾는 데도 제 경험과 지혜를 보태겠습니다.
숱한 고비를 딛고 조선일보는 종합미디어그룹으로 도약했습니다. TV조선은 명실상부한 1위 종편 방송사로 올라섰고, 조선비즈는 온라인 경제뉴스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조선미디어그룹의 오디언스는 신문과 TV, 인터넷을 합쳐 1300만을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글로벌로 확대해야합니다. 특히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세계를 향해 더 목소리를 높여야합니다. 1995년 IPI(국제언론인협회) 서울총회 때 저는 “눈이 가려진 북한 주민들에게 눈을 돌려줍시다. 귀가 막힌 그들에게 귀를 돌려줍시다. 입이 틀어 막힌 그들에게 입을 돌려줍시다. 그들의 이야기를 전세계에 전합시다”라고 참석한 전세계 언론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날의 호소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AI 혁명이 미디어 업계에도 덮쳐오고 있습니다. 틀을 깨는 아이디어가 절실합니다. 시행착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굳은 의지입니다. 신임 사장과 전직원이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또 다른 100년을 위한 혁신 청사진을 그려주기를 당부합니다. 그런 혁신 속에서도 조선일보가 지켜온 사실 보도의 언론 원칙 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 패기가 더해진다면 어떤 도전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제 사장이라는 최선봉에서 내려오지만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할 말을 하는 언론인이 되도록 바람막이 역할을 계속할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100여년 동안 타협없이 지켜온 정론지의 전통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31년 전 저는 ‘훗날 조선일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고, 선대 사장님들에 이어 정직하고 열심히 일한 사장으로 기록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막중한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