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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가 한국 근현대사와 호흡을 함께하며 30000호 발간의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힘을 합쳐 신문을 만든 많은 사람의 고뇌와 땀이 있었습니다. 시대의 고비마다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며 지면을 빛낸 논객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했던 문인들, 그리고 늘 넉넉지 않았던 경영을 책임지며 이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경영자들의 면모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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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홍(1891 ~ 1965)
    - 주필 사장
    - 1924~1932재직

    일제 치하 조선일보를 대표한 논객은 민세 안재홍이었다. 3·1운동에 참가해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1924년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주필로 초빙됐고 발행인·부사장·사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에 재직하던 8년간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무려 1450여 편의 글을 썼다. 이 기간 경영 책임을 맡기도 했고,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는데도 한 해 평균 180편이 넘는 글을 쓴 것이다. 그의 글은 짧은 보도 기사가 아니라 장문의 논설이었다. 이는 그가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속필(速筆)이었기에 가능했다. 그와 함께 논설을 집필한 이관구는 “민세는 단숨의 필력으로 사설 한 편을 웅장 담대하게 반 시간 안팎으로 써놓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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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일평(1888 ~ 1939)
    - 편집고문
    - 1933 ~ 1939 재직

    일제가 동화 정책을 펴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1930년대 조선일보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칼럼과 사설을 게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사학자 호암 문일평이었다. 그는 1928~1931년 배재·중앙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에 글을 썼고 1933년부터는 편집고문으로 상근하며 ‘사외이문(史外異聞)’ ‘화하만필(花下漫筆)’ ‘역사 이야기’ 등을 연재했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방대한 분량의 역사물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일보사에서 ‘호암전집’으로 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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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종인(1903 ~ 1998)
    - 주필, 회장
    - 1925 ~ 1963 재직

    식민지, 내전, 학생혁명과 쿠데타 등 우리 민족이 경험한 격동의 20세기를 조선일보 기자로서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이 홍종인이었다. 1925년 시대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29년 조선일보로 옮겨 1940년 일제가 강제 폐간할 때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편집국장·주필·부사장·회장으로 재직했다. 두 차례에 걸쳐 10년간 주필을 역임한 그의 별명은 ‘홍박(洪博)’이었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퇴임한 뒤에도 편집국에 불쑥 나타나 신문 지면에 대해 까마득한 후배들을 질타하는 정열을 지녔던 ‘평생 현역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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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채(1917 ~ 1991)
    - 주필
    - 1959 ~ 1971 재직

    2000년 5월 IPI(국제언론인협회)가 전 세계 언론인 50명을 선정해 ‘언론자유 영웅’ 칭호를 수여했을 때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포함된 사람이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최석채였다. 광복 후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투신했던 그는 1954년 언론계로 복귀했다. 대구매일신문에서 편집국장과 주필로 재직하던 중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구속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직후 ‘호헌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사설로 4·19혁명의 불길을 지폈고,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 때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으로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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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휘(1922 ~ 1986)
    - 주필
    - 1946 ~ 1980 재직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론 기네스북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선우휘가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광복 후 월남한 그는 언론인의 비판정신을 견지하면서 반공에 투철해 좌·우 양쪽에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 1946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1948년 군에 들어가 정훈장교로 1957년까지 근무했다. 1955년 단편소설 ‘불꽃’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그는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61년 5월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 복귀한 그는 세 차례나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다. 1973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한밤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로 갈아 끼운 사건은 한국 언론사에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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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태(1933 ~ 2006)
    - 논설고문
    - 1959 ~ 2004 재직

    만 23년, 8396일, 6702회.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연재물로 기록되는 ‘이규태 코너’는 1983년 3월 1일 ‘원고지 6~7장에 동서고금을 오가는 이야기로 시사 문제를 풀어내라’는 방우영 사장의 지시로 시작됐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고서와 신문·잡지가 쌓여 있는 서재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쉽지만 알맹이 정보가 가득 찬 감칠맛 나는 글을 써내는 솜씨는 한국과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볐던 그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기자로는 드물게 공대를 나온 그는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연재하면서 ‘이규태 한국학’이라고 불린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의 인맥’ 등 후속 연재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가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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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1901 ~ 1936)
    - 학예부 기자
    - 1928 ~ 1931 재직

    시 ‘그 날이 오면’으로 유명한 심훈은 원래 영화배우 겸 감독이었 다. 1926년 이경손 감독 영화‘장한몽’ 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인 이수일 역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자신이 시 나리오를 쓴 영화‘먼동이 틀 때’를 감 독했다.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해 5만명 관객을 모았다. 흥행 성적은 별로였고, 영화사는 파산했다. 이후 심훈은 조선일보 영화 담당 기자 로 활동한다. 조선일보가 ‘문자 보급 운동’을 활발히 펼칠 때였다.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는 문자 보급 운동을 소재로 한 농촌 계몽 소설이다. 기자 경험이 바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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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명희(1888 ~ 1968)
    - 1928 ~ 1940
    - 대하소설 ‘임꺽정’ 연재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1930년대 10년간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그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동생 홍성희가 조선일보 판매부장, 장남 홍기문이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이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홍명희가 쓴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백정 출신 도적이 주인공이다. 다양한 토속적 어휘와 민속 자료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말의 보고(寶庫)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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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림(1908 ~ ?)
    - 학예부장
    - 1930 ~ 1940 재직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은 ‘조선일보 문인 기자’로 특별히 기록할 만하다. 다른 문인 기자들이 대부분 시인·소설가로 먼저 이름을 알린 뒤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한 것과는 달리 그는 1930년 조선일보 첫 공채 기자로 시작해 ‘문인’으로 나아갔다. 1940년 폐간 때 학예부장(현 문화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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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1879 ~ 1944)
    - 1935 ~ 1940
    - 장편소설 ‘흑풍’, ‘박명’ 등 연재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은 5편의 소설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미발표·미완성 소설을 제외하면 한용운이 생전에 발표해 완성한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과 ‘박명’ 두 편뿐이었다. 1939년 11월 1일부터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삼국지’를 번역·연재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됐을 때 그는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를 써 아픔을 토로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