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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이야기

  • 조선일보 김도균입니다.

    “기자(記者)는 왜 ‘놈’일까?” 인턴 교육 때 이 질문에 각자만의 답을 내려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글쎄요. 나름 열심히 공부해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기자가 돼도 기껏 놈에 불과하다니. 흔히 말하는 ‘사짜 직업’처럼 고고한 선비(士)도, 벼슬(仕) 내지 스승(師)도 되지 못하는 처지가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이런 의문을 품고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달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세상이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한날 새벽 추위에 벌벌 떨다 들어간 파출소에선 경멸의 시선이 쏟아졌습니다. 친구 같아서, 아들 같아서 말 한마디 섞어줄 법도 한데 그런 온정은 경험하기 힘들더군요. 마와리 첫날, 다가오는 보고 시간에 허탕을 칠까 두려워 경찰관에게 애원했더니 겨우 5분 남짓 대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민 인터뷰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인상에 뭔가 친절할 것 같은 사람을 골라잡아봐도 어찌나 매정하던지요. 어딘가 이상한 포교자들을 째려봤던 제 눈빛이 이랬겠거니 싶었습니다. 전화로 하면 덜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취재 사유를 밝히면 말없이 툭 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아마 수습기자로 살아보면 단 며칠 만에도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낙심할 순간이 올 겁니다.

     

    이렇게 매일 사람에 치여 살지만, 그렇다고 사람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기자입니다. 그간 혼자 쓸 수 있는 기사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엔 나한테 사소한 팩트라도 흘려줄 사람을 두는 것, 말이 되는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을 찾는 게 일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구나!’ 위안을 얻기도 하면서요.

     

    서두에 적은 질문의 답을 저는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기자란 ‘늘 낮은 곳에서 놈의 자세와 신분으로 다가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달려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아직까진 그러지 않아야 할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사실 앞에 겸손하라’는 기자의 미덕도 팩트를 얻기 위해서라면 곤욕을 감수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차가운 현실만 적은 것 같은데, 사실 기자로서 느끼는 성취감은 감히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중요한 팩트를 캐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직접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래 친구들은 상상도 못 할 경험을 밥 먹듯 할 수 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왜 수많은 선배들이 이 업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지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기자란 꿈을 품고 계신다면, 꼭 한 번 도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이 믿고 의지할 만한 놈이 되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조선일보 김혜민입니다.

    수습기자가 된 첫날, 새벽 6시 출근 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서울 관악구 낙성대지구대였습니다. 분실물 신고조차 하러 가본 적 없는 제게, 지구대는 그저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돌아오는 대답은 “기자에겐 할 말 없으니 나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전박대에 당황하기도 잠시,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토록 두려웠던 거절을 막상 경험하고 나니, ‘이젠 두려울게 없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두 번째 지구대 문을 두드리는 일은 훨씬 쉬웠고, 한 달쯤 지나자 지구대를 드나드는 것은 일상이 됐습니다.

     

    사실 아직 기자 생활을 1년도 하지 않은 제가 무슨 얘기를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난 9개월 동안 기자가 아니면 평생 해보지 못할 경험을 수없이 해봤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지구대를 들락거릴 일은 평생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구대뿐만이 아닙니다. 제주항공 참사 때는 무안에, 경북 산불 때는 안동에, 탄핵 선고 날에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취재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광경을 보며 시야가 넓어짐을 느낍니다.

     

    기자란 직업은 힘든 것 같습니다. 몸으로 뛰어야 할 때도 많고, 의미 있는 정보를 얻으려면 상대가 불편해할 질문을 마구 던져야 합니다. 책상 앞보다는 맨바닥에 앉아있을 때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마음껏 해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힘들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꼭 경험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조선일보 안태민입니다.

    '하늘아 놀이터에서 화내서 미안해. 천국 가서 쉬어' 지난 2월 대전에서 8세 여아가 교사의 흉기에 목숨을 잃었던 날 본 글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지난 1월 3일 과천 정부청사에서 대통령 체포조 출동을 포착한 때를 생각하면 전율이 돋습니다. 지난 3월 영남 산불 때 집과 일터를 잃고도 "뭐라도 먹고 해야 한다"며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시던 어르신들의 온정이 생각납니다. 현장에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그렇게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는 직업은 기자 말고는 없을 겁니다. 그 순간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즐거움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또 그 희로애락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기자의 몫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무엇이라도 더 알려 세상이 더 나아지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즐거움, 그 바람이 어느 정도는 있기에 기자를 꿈꾸고, 조선미디어에 입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미디어에서 여러분들이 간절한 바람을 품고 에너지 넘치게 현장을 누비며 뛰어난 성과를 내실 모습이 벌써 그려집니다.

     

    취업 준비 과정은 누구나 그렇듯 막막하고,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다만 그 즐거움과 바람을 실현할 미래를 그리며 간신히 버텼습니다. 여러분 또한 그런 미래를 그려 나가시면서 꼭 이 과정을 이겨내시고, 회사에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 조선일보 양인성입니다.

    수습 기자로서 첫발을 내딛자마자 제주항공 참사부터 영남권 대형 산불 피해 사태까지 재난이 쉼 없이 터졌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마주했고 유가족이 지르는 비명을 들었습니다. 한참 뜨거워졌다가도 이내 차갑게 가라앉는 심장을 움켜쥔 채 뒤엉킨 감정의 온도를 겨우 삼켰습니다.

     

    요즘은 특검 사무실이 위치한 검찰청 바닥에 앉아 무작정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른바 ‘뻗치기’입니다. 문을 드나드는 얼굴들을 보며 오늘은 어떤 사연으로 왔을까,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끊임없이 추리합니다. 때론 검사와 수사관이 됐다가, 때론 피의자와 변호인이 돼 치열한 갑론을박을 상상합니다.

     

    대학 시절 연극을 보며 매번 다른 삶을 연기하는 저 무대 위 사람들은 얼마나 고될지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되고 보니 남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기자도 배우 못지않게 다양한 감정과 역할을 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연기를 넘어 현실을 직접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입니다. 현실의 기자 생활은 꿈꾸던 모습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막내 기자의 삶은 대체로 허무합니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고도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이고, “오늘은 뭐 했니”란 물음에 말문이 막히는 순간도 많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회사에서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쓰라 하지만, 고백하건대 저는 아직 특별한 조언을 내놓을 만큼 대단한 선배가 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처음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자 생활에는 분명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수십 번의 헛걸음 끝에 한 줄의 사실이 번뜩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확인한 문장이 기사에 박혔을 때의 짜릿함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헤매던 마음은 조금씩 야물어져 이 직업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겪은 무게를 감당하며 즐길 수 있다면 당신도 기자란 이름으로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배우는 중이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겠습니다.

  • 조선일보 이민경입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이민경입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올라온 선배들의 글을 읽던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은 뿌듯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매일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의 결과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기자가 되기 전에는 기자만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기자가 되고 보니 매일 쏟아지는 뉴스와 사건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 듣기 위해 몇 시간씩 땡볕에서 취재원을 기다릴 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기자라는 직업은 매력적입니다. 거절이 일상이고 기다림이 기본 덕목이지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알지 못했던 정보를 얻는 기쁨은 고생을 잊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더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취준생 기간이 어둡고 길게 느껴지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매일 불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배들의 기사를 읽으며 스스로 기자가 된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불안감을 덜기 위해 한 행동이 필기시험과 면접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함께 단단해질 후배님들을 기다리겠습니다.

  • 조선일보 조민희입니다.

    기자 업무는 ‘하루살이’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간 신문 기자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겠지요. 아침에 낸 아이디어로 잠깐 한숨 돌리고 오후 4시쯤 되면 다음날 먹거리를 고민합니다. 기사가 지면으로 나가는 즐거움과 보람은 아주 잠깐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일 아침 무슨 발제를 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직업을 직접 경험하지 못해 일반화하기가 조심스럽지만, 기자는 스트레스가 큰 직업입니다. 사건-사고 현장에서 유족이 그만 물어보라고 울면서 하소연할 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20대 여자인 제가 80대 할아버지와 단 둘이 소주잔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회사에선 선배들로부터 글 못 쓴다고 자주 혼나니 재주가 없나 싶기도 합니다. ‘온실 속의 화초’였던 제가 마주하는 세상은 두렵고 험난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버티는 건 기자로서의 자부심 덕분입니다. 기자를 하면서 맛볼 수 있는 도파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수습 시절 방화범의 지인을 만나 단독 인터뷰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12시간 동안 현장에서 물 한 모금도 못 마셨지만 괜찮았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짜릿함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들이 기자로서의 제 수명을 하루씩 연장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한지 고작 1년밖에 안됐지만, 기자에게 거창한 포부와 대단한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취재와 글쓰기에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발로 뛰어 얻어낸 정보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직접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그 기쁨과 자부심이 저를 더욱 열심히 뛰게 만듭니다. 신문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다면 꼭 도전해보세요. 응원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조선일보 최하연입니다.

    “한국의 저널리스트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애타게 듣고 싶어합니다” 탄핵 시위 현장이 외국인들의 다크 투어리즘 명소가 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취재할 때의 일입니다. 17만 구독자를 보유한 인플루언서가 저를 소셜 미디어에 ‘샤라웃’하자 전세계에서 날아온 장문의 메시지로 휴대폰 알림창에 불이 났습니다. 덕분에 순조롭게 기사를 썼습니다. 이런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날은 ‘기사가 마음에 안 드니 회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겠다’는 취재원의 연락으로, 또 어느 날은 ‘왜 내 기사는 안 써주냐’며 밤낮 없이 전화하는 민원인의 연락으로 휴대폰에 불이 납니다.

     

    아직도 이름 뒤에 붙는 ’기자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합니다. 인턴을 포함해 기자로 생활한 기간이 1년이 채 되지 않은 저이지만, 기자는 거절과 냉대에 익숙해져야 하는 직업인 동시에 분에 넘치는 애정과 관심을 받을 수도 있는 직업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당장 흉기(노트북) 챙겨서 나가라”며 파출소 코앞에서 쫓겨나기도, 취재원 섭외를 위해 고민하다 연락한 지인에게 ”누구세요“ 네 글자 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눅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대신 목소리를 내 달라며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할지 환대를 받을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세계에 문 두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자는 참 매력적인 직업인 것 같습니다. 만학도 어르신들과 하루 동안 학교생활을 같이하는 경험도, 세상에 하나뿐인 마술쇼와 트로트 공연을 1열에서 감상하는 경험도 모두 기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면, 그래서 이 페이지를 정독하고 계시다면 일단 한번 문 두드려 보시길 권합니다. 후배님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조선일보 한영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한영원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꽤 오랜 기간 기자를 꿈꿨습니다. 온갖 정보의 최전선에 서는 기자가 되면 이 세상 모든 '정답'을 알게 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답은커녕, 세상이 더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손발이 얼어 터질 것만 같은 지난해 12월 겨울, 거리 한복판에서 수습기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한남동 관저 앞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 헌법재판소 앞에 드러누워 밤을 새우는 사람들.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머릿속엔 물음표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제가 한창 헤매고 있어도 기사는 뚝딱 나오더군요. 성에 차는 답이 보이지 않아도 신문은 매일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원래 정해진 답이란 없는 것 아닐까." 그런 혼란스러운 세상이라도 묵묵히 지면에 문자로 담아내는 일, 그게 제가 택한 기자 일의 본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기자가 되고서야 하게 됐습니다.

     

    인턴과 6개월의 수습을 마친 지금이지만, 여전히 스스로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정제된 언어로 소중한 지면 위에 올려놓는 일이 언제쯤 익숙해질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과 만나기 전까지 쓸모 있는 선배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더 다듬고 있겠습니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됩니다. 함께 겨울을 견뎌내고 따뜻한 봄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조선일보 강지은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자가 되려나 고민하며 이 글을 누르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고작 1년차 새내기 기자인 저는 아직 어떤 사람이 기자가 되는지, 어떻게 준비하면 기자가 될 수 있을지 그 정답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곧 그만두겠다고 거의 매일 뇌까리면서도 다음날 아침이면 번번이 전날의 다짐을 뒤집고 신명나게 출근하는 이유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월 3일, 수습기자로 첫 근무를 시작하던 날엔 겨울비가 내렸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가본 '지구대'라는 곳에서는 "언론 응대할 사람 없다"며 퇴짜를 맞았더랬죠. 에너지바와 핫팩으로 가득찬 가방, 휴대전화와 명합지갑에 늘어진 양쪽 외투 주머니, 두꺼운 장갑 낀 손으로 든 우산, 그 모든 게 얼마나 성가시던지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나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쌓이면 눈길을 헤치고, 해가 나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녀야겠다는 걸. '기자'라는 직함이 이름 뒤에 붙는다고 새로운 정보가 하늘에서 떨어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걸.

     

    그렇게 경찰서와 길바닥을 허위단심으로 쏘다니며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발제한 기사 아이템 취재를 위해 전국 지자체, 은행, 분식집, 초등학교 등 전화를 안 돌려본 곳이 없습니다. '아파트' 취재를 할 때는 10군데 넘는 건설사에 모조리 전화를 하고, '학식' 취재를 할 때는 대학마다 메일을 보내는 식입니다.

     

    취재라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출근길 시민들에게 말을 걸라치면, 그들 눈에 기자는 '도를 아십니까'를 외치는 포교자와 다름 없습니다. 취재원에게 "한 번 찾아뵐 수 있냐"는 문자를 5번 이상 보내도 답장 한 번 없이 무시당하고 나면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싶어 씁쓸합니다. "그 사실은 알려줄 수 없다"는 취재원의 단언에 한 번만 알려달라고 불쌍한 척 애걸하기도, 왜 알려줄 수 없냐고 따져 묻기도 하며 이중인격자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취재는 어렵고, 사람들에겐 번번이 거절 당해서 기자 일이 재밌습니다. 하대를 즐기는 특이 취향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낯선 시민들과 결국에는 친해져 그들이 나눠주는 삶의 한 부분이 감사합니다. 거절당할지언정 누구에게나 만나자고 청할 수 있어 자유롭습니다. 공개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당당히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 기자라는 자의식이 든든합니다.

     

    숱한 거절 속에서 느끼는 자유의 쾌감을 함께 즐길 후배님들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 조선일보 강우석입니다.

    기자란 무얼까요. 단어 그대로 기자(記者), 옛 조선시대의 사관처럼 시대의 대소사를 명료하게 기록하는 직업일 수 있고, 날 것의 현장에서 우리 사회 폐부 곳곳을 찌르거나 대안을 길어 올리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흥미로운 읽을 거리를 발굴하는 데에 의의를 두기도 합니다. 과격한 멸칭으로 기자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자만큼 정의가 다양한 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텍스트(글) 노동자라는 속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다루는 직업, 그것이 어렵다면 글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일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운 좋게도 현장의 최전선에서 그것을 지겨울 만큼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됐습니다.

     

    다만 직접 경험해보니, 기자, 특히 제가 몸담고 있는 사회부 기동팀의 일은 무엇보다 ‘사람’ 노동자라는 말이 제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유의미한 일을 하기 어렵습니다. 수습 시절부터 만나 5분 이상 대화를 나눈 사람만 세어도 경찰, 노점상인, 방화범, 의사, 암 환자 ... 등 수백 명에 달합니다. 더구나 기자는 마냥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 놓이는 일도 많습니다. 거절, 무시 당하기는 일쑤고, 심한 경우 면전에서 천박한 욕설을 마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등질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향한 환멸이 극에 달할 때에도 사람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것. 시작과 끝에 사람이 있는 업을 가진 이상 지녀야 하는 마음입니다.

     

    최근 한 청각장애 구두수선공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14년째 해외 결핍 아동에게 기부를 이어오신 분이었는데, 선천적으로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셔서 화이트보드를 두고 서면으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사랑”이라는 단어. 그 분은 ‘어려운 형편에도 기부를 이어가는 이유’를 묻는 제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두 글자를 적어 넣으셨습니다. 그 순간을 나의 활자로 옮길 수 있다는 것, 이 업만이 줄 수 있는 기쁨입니다.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한번 해볼 만한 직업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 조선일보 구동완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곤 합니다. 멋있는 옷을 사 입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생기는 소소한 행복부터 성취와 주변의 갈채로 얻어지는 내적 뿌듯함처럼 다소 진귀한 행복까지 말이죠. 행복은 우리네 삶을 지체없이 추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행복을 추구하는 까닭은 삶이 고되고, 실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의 삶은 순탄치 않습니다. 기자의 삶은 날 것 그대로인 우리의 생애와 맞닿아 있기에 험난합니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려는 지점과 늘 마주해야 하고, 누군가 감추려는 흑심(黑心)을 수면 위로 드러내야 합니다. 또 언젠가 내 자신도 그리 떳떳하지 못한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7월 말 은평구의 한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담배를 피우러 집 앞에 나온 한 40대 남성이 이웃이 휘두른 일본도(日本刀)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매체에서 보도하는 뉴스로만 접했더라면 호기심에 한 번 들여다보고 넘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파트 정문에 낭자하던 핏자국이 풍기던 역한 비린내와 자식의 끔찍한 비명횡사를 받아들이지 못한 유가족의 울분은 켜켜이 쌓인 삶의 껍데기를 단번에 날려버렸습니다. 삶이 늘 죽음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은 그 순간, 현장을 마주하기 전과 달라진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삶이 고통의 연속이란 사실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껍데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날 것만을 바라본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때론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내가 살아온 삶을 통째로 부정하고 주변의 모든 것을 혐오하기 시작할 정도로 지난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전진할 때,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견뎌낼 만큼 성장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기자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해답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조선일보 김병권입니다.

    ‘정답이 없는 직업’

     

    인턴을 포함해 기자라는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저이지만, 이 직업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건 양면성을 지닙니다. 이러한 직업적 특성 때문에 많이들 들어보셨을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격언조차 때로는 의미 없는 공염불이 되기도 했습니다. 취재원이 오염되기도 하는 등 현장에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MBTI가 J인 저로서는 이런 예측 불가한 상황이 닥칠 때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는 말은 달리 보면 발제 영역과 취재 방향이 무궁무진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속해있는 사회부 기동팀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제는 교제 살인 현장과 사망자 장례식장을 갔더라도 오늘은 제주도에 가서 관광객 취재를 할 수도 있는 게 이 직업입니다. 일반 회사원이라면 가보기 힘든 현장에 가서 내가 생각한 야마에 맞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쓴다는 건 나름의 특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이 풀리기도 합니다. 언론 응대 담당인 경찰서 과장이 확인해주지 않은 사실을 평소 친했던 경찰한테 듣거나 타사 기자들이 생각해보지 못한 루트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돼 단독 기사를 쓰게 될 때, 이 일을 더 하게 될 힘을 얻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아마 기자라는 직업에 흥미가 있는 분들이실 겁니다. 이만한 직업이 없으니 꼭 기자가 되라는 건방진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인턴으로라도 경험해 보셨으면 합니다. 정답이 없는 이 직업과 세상 속에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사실을 찾아내는 그 기쁨을, 여러분도 한 번쯤은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 조선일보 김보경입니다.

    조선일보 김보경입니다. 경험해 보니 기자의 업은 곧 ‘삶’인 것 같습니다. 내가 왜 기자가 돼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면, 결과적으로 나는 어떤 자세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생각해 보세요. 거기 해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적으로 저는 ‘앉아만 있기 싫어서’ 기자직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준비생 시기를 '불안을 벗어던지는 시간'으로 삼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취준생 시기를 돌아보면 불안감이 제 온몸을 휘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는데 제 맘대로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이 너무 많았거든요. 원치 않는 결과 앞에선 내가 살아온 길을 부정하거나 바꿀 수 없는 조건을 탓하기도 했습니다.

     

    조금 절망적이지만 기자의 삶도 불안의 연속입니다. 어디든 가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큰 자유는 장점이지만 그 이면엔 불안이 넘실댑니다. 매일 어디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고 꼼꼼히 취재하는 것 모두 나의 책임입니다. 그 부담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내 하루 정도는 내가 스스로 꾸려갈 수 있다는 그 감각을 심지처럼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엔 준비생 시기에 취미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마음이 끌려서 언제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있다면, 그게 취직 후에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더군요.

     

    입사 9개월을 앞둔 막내인데 벌써 선배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니 무척 떨립니다. 그간 저도 도움 드릴 수 있을 선배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쓰고 있을 테니, 여러분도 지지 말고 이 터널을 완주해 주세요. ‘조선일보 기자’의 정형은 없다지만 스스로를 믿는 그 마음만은 잃지 마시고요. 다변한 세상을 함께 마주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곧 만나요!

  • 조선일보 김영우입니다.

    "영우야, 네가 아산에 좀 가야겠다. 회사로 지금 이동하자."

     

    기자가 된 후 첫 마와리를 돌던 날이 아직도 기억 납니다. 점심을 먹고 파출소로 가고 있는데 일진 선배께 갑자기 전화가 왔죠.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피습한 김모씨의 집에 취재를 가야 한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다른 선배와 급하게 향한 충남 아산. 제 첫 임무는 김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웃들에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자로서의 첫 임무치곤 꽤나 어렵게 느껴졌죠. 그래도 눈을 딱 감고 옆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사람은 나오지 않았고, 윗층으로 향해 또 다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결국 그날 기사가 될 만한 정보를 얻어내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씨가 사는 아파트 모든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그리고 3일 동안 집 앞에서 김씨의 가족들을 기다리면서 '기자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느꼈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현장에 덩그러니 놓였습니다. 전공의들이 사직했을 땐 병원으로 가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폐지를 줍던 70대 노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땐 노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듣기 위해 노인과 함께 폐지를 줍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자가 되는 바로 그 날, 여러분의 삶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집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전 6시에 파출소 문을 열다 쫓겨나고, 오후 10시에 아무도 없는 경찰서 1층 로비에 멍하니 앉아 오는 사람이 없는지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기자로 일하며 남들은 하지 못하는 경험도 수없이 할 수 있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해 직접 난타를 배워 공연을 다니는 요양원 원장 난타단의 '1호 팬'이 될 수도 있고, 남들보다 40~50년 늦게 학업을 마치는 만학도의 사연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할 준비가 돼 있는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조선일보 장윤입니다.

    저는 조선일보 채용연계형 인턴을 서류 전형부터 탈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공채 전형으로 입사했습니다.

     

    저는 작년 봄부터 기자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생이었던 저는 공부밖에 한 게 없었고 기자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유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 공부하고 글 써서 돈 벌 수 있는 직업이 교수 외에는 기자뿐이었기 때문에 기자를 선택했습니다. 나이는 많았고 자기소개서에 쓸 수 있는 스펙도 없었습니다. 주변인들은 교원임용시험이나 법학적성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걱정했습니다.

     

    맨주먹이던 그 때, 매일 새벽 새 신문이 기숙사 방문 앞에 놓인다는 사실이 저의 기쁨이었습니다. 어느 신문사의 어느 전형을 탈락하든 그 다음날이면 새 신문이 왔고, 읽고 공부할 것이 있어서 다시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진심으로 기자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기자를 준비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멋진 스펙이 생겨서(저는 조선일보 65기 기자들 중 유일하게 인턴 경력이 없습니다) 공채 전형에 합격한 건 아닙니다. 매일 신문을 읽으며 내가 왜 기자를 해야 하는지, 내가 기자가 되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할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내 공부로 모두를 위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런 글을 매일 새롭게 쓰고 싶어졌습니다.

     

    모든 언론고시생들은 언론사 입사 준비를 하는 동안 매일이 불안할 것입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도 불안합니다. 그 불안을 견디며 매일 발제거리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보도된 기사를 읽습니다. 혹은 매일 발제거리를 찾고 사람을 만나고 보도된 기사를 읽음으로써 불안을 견딥니다. 언론사 입사 준비 기간 동안, 별 볼일 없어 보이는 하루도 열심히 사는 연습을 해 두길 바랍니다. 매일 신문 한 부 두께만큼 성장하고 있을 본인을 믿길 바랍니다.